겸손
겸손이라 함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겸손은 땅처럼 낮고 밟히고 쓰레기 까지 받아들이면서도 그곳에서 생명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자라 열매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겸손에 대한 부끄러움 이었습니다. 나는 겸손을 내 몸 높이로 보았습니다. 몸 위쪽이 아닌 내 발만큼만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발이 아니라 그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밟히고, 짓눌려, 아픈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그 밟힘과 아픔과 애태움 속에서 나는 쓰러진 채 침묵 하지만 남이 탄생하고 자라 열매 맺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은 나무도, 물도, 바람도 아닌 땅이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일부러 겸손한 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고위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더 많습니다. 거짓된 겸손은 경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겉으로 겸손한 척 꾸미는 것일 뿐입니다. 겸손의 기준은 자아라는 것입니다. 자아가 가득한 상태에서 하게 되는 생각, 말, 행동이 교만입니다. "저는 부족합니다."라고 말할 때라도 그 안에 "자아와 자기 높임"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교만이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23,11-12)
겸손한 사람은 주변사람을 편안히 쉬게 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주변사람을 긴장시킵니다. 열등감은 남들보다 높아지기 원하는 자아가 충족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은 교만의 다른 이름입니다. 비판과 질투는 자아가 다른 이의 성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깎아내리기 원하는 교만입니다. 변명과 합리화는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교만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 역시 자아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내보이지 않는 교만입니다. 자기연민은 스로를 불쌍히 여기고 다른 사람도 나를 불쌍히 봐주기를 바라는 것이며 자아를 인정받고 싶은 교만의 다른 이름입니다. 겸손을 가장하는 것은 자아가 다른 사람이 나를 인격자로 봐주기를 바라는데 이것 역시, 자아에 집착하는 교만의 한 형태입니다.
사람들이 만들거나 꾸민 겸손을 진짜 겸손인 냥 철두철미하게 믿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추하고 더러운 위선자인 이들은 겉으로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고, 거룩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존경하게 됩니다. 주로 종교 기득권자나 정치, 경제 권력자인 이들은 유명 인사나 정치 권력자를 가까이 하기를 기뻐하며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을 멀리하고 꺼려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겸손해질까요? 나에게 오는 굴욕들에 의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약점에 대해 기뻐함으로써 나는 겸손해집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의 신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이것 하나만 잘 지켜도 겸손해 질수 있다고 믿습니다. 대부분 교만하거나 우월감에 빠진 사람들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만이 최고인척 착각에 빠지지요. 아니면 남의 말을 중도에 끊어 버리고 자기의 주장만 내 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을 낮추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남의 말에 귀 기울이 것, 다 듣고 나서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 이것이 겸손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나도 소중하지만 남도 소중하다 는걸 알아야 한다는 거죠 마지막엔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겸손해 지며 그러다 보면 남에게 존경을 받게 되고 친구와 가까워지며 어른에게는 칭찬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겸손한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등병이 화내는 것 보았습니까? 병장쯤 되어야 화도 내는 것입니다. 분노 속에는 숨겨진 교만이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우리의 풍부함이 아니라 우리의 비움과 겸손입니다. 열렬한 자매는 자기 자신의 약점에 대해 자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약점을 볼 때에 행복해지려고 애씁니다.” 아 멘
2009년 4월 14일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로 겸손을 미덕으로 실천하신분이라 생각을 합니다. 평화신문의 사설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0여 일이 지났다. 고인을 조문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일이 어제인 듯 생생한데 벌써 50일이 훌쩍 지난 것이다. 서울대교구는 한식인 5일 김 추기경 묘소에서 봉헌한 추모미사로 공식 추모기간을 마무리했다. 공식 행사를 통해 김 추기경을 접하기는 이로써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나 김 추기경을 우리 곁에서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고인의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고인의 영혼은 산 이와 죽은 이 모두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지상의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서울대교구와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이 공식 추모기간을 끝내면서 김 추기경의 마지막 말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에 응답하고자 '감사와 사랑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 운동이 고인을 우리와 항상 같이 머물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 추기경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보여준 큰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의 유지를 잇는 '감사와 사랑 운동'이야말로 고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진정한 추모임을 확신하는 까닭이다.
'고맙습니다'와 '사랑합니다'는 말을 단순히 주변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에 불과한 '감사와 사랑 운동'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쉽고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다면 결코 쉽지도 당연하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내 가족에게, 이웃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정진석 추기경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감사와 사랑의 표현은 인간관계의 근본이다.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과 표현이 습관화되고 자연스러워진 상황을 상상해보자. 분명 지금보다 갑절은 더 행복한 사회일 것이고, 인간다운 사회일 것이다.
'감사와 사랑 운동'이 제시한 5월말까지의 실천사항은 '가족ㆍ직장 동료ㆍ친구 등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사랑 표현하기'와 '내가 먼저 웃으며 인사하기'다. 그야말로 간단하고도 쉬운 일이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순전히 우리에게 달린 문제다.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한 번 실험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