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람
과연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 "완전함을 추구하고 갈구하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 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누구든 확신의 정의는 정확하게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예들을 보고 "저 사람은 완벽해" 라고 많이 이야기 하곤 합니다. 그들에 대한 보편적인 판단은 그 사람들의 외모, 능력, 재력 등과 같이 보이는 것에 의한 판단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도전하고 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모두가 완전하기를 원하며, 나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생활 속의 고통이나 번민으로 인해 추구하는 바를 잊고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지금의 길이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진정 완전한 삶을 원한다면 말입니다.
완전한 사람하면 훌륭한 사람 또는 성인을 말하기 쉽습니다. 또는 사랑과 행복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을 뜻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도 한 쪽으로 치우친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답은 무엇이든 줄 수 있는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 전쟁, 온갖 병마, 가난과 슬픔, 행복과 불행, 슬픔과 기쁨, 사랑과 증오, 폭력, 분노, 저주, 축복, 자유, 성공과 실패,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이라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보통 사람에게 사랑이나 자유를 달라고 하면 선뜻 내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폭력이나 분노를 달라고 해보면, 이는 즉시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가진 것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려면 성공한 사람을 찾고, 사랑과 행복을 원한다면 사랑과 행복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이고, 돈을 얻으려면 돈을 가진 자를 찾아야 하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진 부자들은 무척 인색하다는 것이 공통분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직장을 구하고, 사기 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개인의 삶이란 완전해지기 위하여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접근이며, 도전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신을 닮아야 하는 것처럼 무엇이나 만족스럽지 않고 늘 부족하고 잘못한 것 같고 죄의식에 허우적거리다가 힘들면 자학하고 지치면 기도한다고 빌다가 다시 일어나고..... '완전한'이란 단어의 노예처럼 허덕이며 그분의 눈을 의식하고 나를 다그치기 일쑤입니다. 남보다 분명히 열심이고, 남보다 기도도 더 많이 하고, 남보다 봉사도 많이 하고, 남보다 봉헌금도 더 내고, 남보다 성서공부도 더 하고, 더 더 더....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은 것은 어딘가 늘 부족했기에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를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늘 자책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온전히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미소와 조용한 말투 조신한 몸짓이 모두 진실일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보는 사람이란 그 분 모상으로 만들었어도 우리 인간의 탓으로 우리 안에 원죄의 기록을 가지게 되었고, 대를 이어가며 그 죄는 다른 죄를 부르고 다시 하느님의 용서로 회복되고 하면서 불완전함을 줄여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아무도 사람으로서의 완전함에 대해 재해석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만들어 가는 관념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단죄하고 금 긋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에서 자주 모순을 느꼈고,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이면 그러실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올바르지 않은 룰이 굴러가고 있는가? 일일이 나열 할 수 없이 상처 입히고 상처 받으며 나름대로 성장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수하니까 사람이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부족해야 하느님과 사람이 구별 될 것이고, 다만 마음 안에 그분의 완전성을 갈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은 의지를 가지는 것이 우리의 자세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때부터 참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으며, 나에게 맞지 않는 사람들이 우긴다 해도 그냥 웃으며 내버려 둘 수 있습니다. 누군가도 스스로 깨어지고 일어설 것이니까. 그래서 타인의 믿음의 정도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은 위험한 일라 생각합니다. 너무나 열심 하던 형제가 어느 날 개종을 하고, 밤낮없이 봉사하던 사람이 냉담하고, 마귀처럼 변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보고 우리가 단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결석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교육의 질이 다 좋다고 말 할 수 없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야리꾸리하고 거룩함으로 도배된 것 같은 그런 자세보다 이제는 툭 트이고 시원하게 약점을 고백할 줄 알고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았는데 속도가 더디네 하면서 주님이 부르는 날까지 사람냄새 충실히 풍기는 것이 완전한 사람의 흉내라도 내는 것 아닐까요. 성인이 꿈이 아니었던 우리로서는 그 편이 더 완전한 사람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너희도 나처럼 완전해져라가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셨기에 위안을 얻습니다. 사랑을 얻으려 열심히 달리다가 넘어져도, 사람답게 상기위해 10개를 달라고 기도를 했으나 1개밖에 얻지 못했다 해도 완전을 향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출렁거리고, 흔들리고, 부족하고, 실수하고, 그런 나를 보듬어 주시는 분이 완전한 분이시고 나는 그 분의 힘으로 채워지고, 일으켜 세워주고, 낫게 해 주시고 하는 것들이 놀라워 그분을 찬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완전한 사람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죽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잃은 채로 있으며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행복은 자신과 만물이 헛됨을 아는 것, 하느님을, 오직 그분만을 아는 것, 하느님께서 뜻하고 택하시는 것만을 알고 다른 모든 의지와 선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이라 합니다. 성바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하느님을 아는 것'에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알고 뜻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마이스터 에카르트 -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