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교리상식

苦痛(고통)의 神秘(신비)

더 창공 2009. 7. 3. 09:48

苦痛(고통)의 神秘(신비)

 

우리는 살면서 이런 저런 고통에 시달리며 힘들어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한다.

행복은 어쩌면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사자성어로 또는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말로 고통의 힘겨움에서 위로받기도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새겨 보면 고생이 인생 삶에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쁨은 고생 또는 고통에 비례한다고 한다. 기쁨이 크면 글수록 그만큼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통(陣痛) 끝에 귀여운 아기가 탄생하였을 때 산모(産母)는 그 고통을 잊고 새 생명을 바라보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고양이를 실험했는데 무통분만을 하게 하여 새끼를 낳게 한 어미 고양이는 새끼들이 귀찮게 하자 이를 피하다 결국에는 물어 죽였다. 그러나 정상 분만한 어미 고양이는 새끼들을 잘 돌보더라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보여 주는 것은 고통이 없이 이루어진 것은 그 소중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이 올 때 그 고통을 감내(堪耐)하라고 한다.

苦痛을 옥편을 통해 살펴보고 고통(苦痛)의 신비(神秘)가 한자에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苦 = 草 + 古’로 되어 있다. 草는 풀이고, 古는 옛일, 오래됨, 낡고 헐음의 뜻이 있다. 古代는 옛 시대이고, 古鐵은 낡은 쇠이고, 古冢은 오래된 무덤이요, 古物은 헌 물건이다. 苦는 옥편에 보니 ‘쓴 나물 고, 씀바귀고, 쓸 고, 괴로울 고, 모질 고’ 등으로 되어 있다. 草와 古는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를 묶어 ‘苦’자를 만들어 냈을까? 봄이 되면 농촌에서는 둑에 불을 질러 태운다. 지저분하게 말라 버린 풀들을 태우면 깨끗해지고 새 풀들이 파릇하게 나온다. 풀이 불에 타는 고통이 있겠지만 뿌리가 뽑히지 않는 한 죽지 않고 다시 소생한다. 내가 처음 주말농장을 할 때 콩을 심었는데 어찌나 무성하게 잘자라 수확을 많이 하리라 기대했는데 열매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과감하게 잘라 주어야 결실이 좋다. 그 다음부터는 콩 농사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콩과 식물은 잘리는 아픔을 겪어야 잘 되는 것이다.

‘痛 = 疾 +甬’으로 되었다. 疾(질)은 병이다. 병은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甬(물 솟아오를 용, 초목 빛날 용)자가 왜 중심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얼마나 기막힌 뜻 깊은 자인가! 병에는 죽음의 절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숨은 희망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다시 물처럼 솟아오르는 생명이 있음을 암시하는 자가 아닌가! ‘苦와 痛’은 부정의 모습만 보이나 내면을 살펴보니 긍정의 희망이 있는 기막힌 글자들이다.

苦와 痛을 묵상하노라니 예수님의 수난(受難)과 십자가상의 죽음의 고통이 떠올랐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는 고통의 신비(神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부활(復活)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었기에 그 처절한 고통을 참아냈던 것이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를 알아듣지 못했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순교(殉敎)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과 고통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復活)은 바로 우리들에게 더할 수 없는 희망으로 다가와

어떤 두려움과 고통(苦痛)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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