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묵상

관계의 회복

더 창공 2010. 6. 30. 10:43

관계의 회복

 

복음: 마태 8,1-4

나균이 전염된다는 것과 나병 환자는 천형 (天刑) 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차별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때 나병 환자들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었고 마을을 떠나 동굴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낙오뿐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어 격리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는 삶은 육체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썩어 잘려나가고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눈조차 함몰되는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는 피붙이인 자식과 친척과의 단절도 포함되기에 그 고통은 차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한하운 시인이 나병을 벌 (罰) 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회의 부당한 편견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상 병이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천형이니 문둥이니 하며 차별하는 사회적 냉소주의는 나병 환자들이 나균에 감염되었을 때보다 더한 좌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한하운, <벌 (罰) > 중에서) 라고 절규한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로써 나병 환자는 격리되고 단절된 변두리 삶에서 사회라는 관계 속으로 들어와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깨끗함과 부정의 경계선이 없어지고 다시 사람이 되는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의학 발전으로 병으로서 나병은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단절로서의 나병은 여전히 위협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더 소외시키고, 익명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시 서로의 얼굴과 마음이 보이는 관계를 회복해 갈 필요를 느낍니다. 불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방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자세를 극복하도록 서로 돕는 것, 사회적 소외와 불의가 벌어지는 현장에 관심을 갖는 것, 이런 구체적 실천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사회정의를 통합해 가는 것이야말로 관계의 회복이고, 이것은 혁명처럼 느껴집니다. 그 혁명이란 무위당 (無爲堂) 장일순 선생의 말씀처럼 보듬어 안는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