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가 가져다주는 행복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고 보람을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용서의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를 포함한 모든 영적 스승들께서 하였듯이, 용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나의 태도가 내적 갈등으로부터 내적인 평화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렇듯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게 고요한 평화와도 같은 힘이 주어진다고도 볼 수 있으나, 내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을 만 한 힘이 있기 전에는 타인을 용서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란 하늘에 선행의 보화를 쌓는 것과 같은 '행위'가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고, 믿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따라서 용서는 곧 신앙이라는 등식이 성립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죄를 사람이 심판할 수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때에는 나 자신이 나릉 용서하지 못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일 또한 스스로를 용서 못하는 일인데, 그것은 결코 선명한 양심 때문도, 곧은 정신 때문도 아니고, 그저 오만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에게 '금연' 표시가 된 공공건물 안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이들은 타인에게 간접흡연이 미칠 악영향을 외면하는 '나쁜 놈'들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나쁜 짓거리를 예전엔 나도 다 했었습니다. 나쁜 짓 하는 나 자신을 타인이 양해해주고 용서해주기를 기대했듯이, 지금 실내흡연이라는 '나쁜 짓'하고 있는 저 타인들을 이제는 입장이 다르다 하여 욕하고 미워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욕하고 미워했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이러한 짓거리가 참으로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나쁜 짓'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서 그들을 욕하거나 미워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평상심으로 다가가 정중히 금연규칙을 준수해줄 것을 청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지하철 안에서, 식당 안에서 시끄럽게 날뛰며 노는 아이들과, 또 그런 제 자식들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부모들은 내가 보기엔 다 한심한 인간들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 '한심한' 자들에게 내가 취하는 행동은 째려보기, 혀 차기, 손가락질하기, 또는 불평 섞인 말 한 마디 하기 정도가 되겠지요. 저자들이 한심하게 행동했으니, 내 행동도 당연히 한심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한 번은, 그렇게 날뛰는 아이들을 나직하고도 자애로운 음성으로 불러들여서 웃음 띤 말을 건네고, 칭찬해줌으로써 평화를 가져다준 사람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 분을 보면 '한심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을 경험 했습니다.
나 자신도 과거에 다 저질렀던 짓들입니다, 공공장소에서 설치고, 소란 피우는 일 정도는. 소싯적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술 취해서 실수했던 일도 있었고, 교통법규를 어겼던, 그랬던 것 다 타인들로부터 용서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내 눈앞에서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이들을 욕하고 미워한다는 것, 너무 웃기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순합니다.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죄는 타인도 저지를 수 있고, 나를 용서했듯이 타인도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용서해줬듯이 타인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단순한 결론 안에 인간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너와 나의 하나 됨'이라는 진리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그에 따르는 좌절과 통탄을 겪고 나서야 예전의 오만함을 떨치고 훨씬 겸허해질 수 있고, 세상의 온갖 죄인들을 궁극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귀한 존재들로서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실로 미워할 것은 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나도, 다 이 인생의 무대에서 저 자신을 잘 알아보기 위한 깊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죄'라고 지칭하며 혐오하는 그런 행동에 자신을 잠시 맡겨보았을 따름이겠지요. 매스컴을 통해 천인공노할 범죄의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저런 쳐 죽일 놈 같으니라구' 하며 목에 핏줄을 세우며, 저 짐승 같은 인간이 저지른 죄를 나는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면서... 내가 저 인간이 처한 똑같은 처지에 들어가 있다 한대도? 확실해? 난 하지 않을 것이야! 하며 자신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그 마저도 용서해줄 수 있기를 희망 합니다. 그렇다면 죄질의 심각성의 정도에 따라 용서해줄 수 있는 죄의 한계라도 설정해놓아야 하는 것일까요? 극악무도한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도 자비의 손길을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용서받지 못할 이들일까요? 내 생각에는 용서의 범위에 한계가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인간이 그 한계를 설정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숱한 나의 많은 죄들을 수많은 타인들이 무수히 용서해주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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