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예행연습
사실 죽음을 연습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면서도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입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담게 되는 일조차 싫어하며 거부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여기에 죽음의 예행연습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미쳤다고 말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저는 22년 전에 안양 나자로 마을에서 피정 때에 죽음을 묵상하기 위해 십자기를 지고 바지는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맨 무릎으로 맨땅을 기어가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직접 체험을 하고 난 죽었다 하고 관속에 들어가 뚜껑을 닫을 때의 두려움에서 뚜껑이 닫힌 다음의 몸과 마음의 평안함을 경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최성균 신부님 피정)
그런데 2009년 남성 사순 피정이 3월 28일 오후10시부터 29일 새벽 5시까지 수유동에서 있었습니다. 또 다시 그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제 :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티모Ⅱ 4,7_8)
내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시간은 이제 몇 시간뿐이니 유서를 작성하라 하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 누가 유서 작성을 연습했던 일이 있겠습니까? 기승전결?, 육하원칙?, 그것들은 허상이겠죠. 죽음을 실행 하려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어느 분은 어떻게 쓰냐고 묻기도 하더군요. 해서 그냥 내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글씨를 예쁘게 쓸 필요도 없고, 앞뒤좌우가 맞지 않아도 되니 그냥 쓰시라 했더니, 2장을 다 써야 하냐고? 또 묻더군요. 저의 대답은 - 1장을 쓰던 2장을 쓰던 그것은 죽는 사람 맘이라고 했더니 뭐라 쓰기 시작을 했습니다.
나 역시 3분여를 생각을 해 보니........
50여년을 스쳐 지나온 모든 일들이 잘 한 것 보다는 못 한 것들이 나의 좁아진 마음을 더욱 아프게 조여 왔습니다. 그들에게 그때는 이렇게 해 줄 걸.... 상처를 주는 행동이나 언행을 좀 더 생각하고 행 할 것을....등등 화려함이나 나의 우쭐한 자만심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작성한 유서가 내 죽은 다음에 뭇 사람들에게 읽혀질 것이고.... 이제 나는 죽으니 산사람의 몫은 모두가 반납을 한 상태라 생각을 하니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가족들의 얼굴이 가장 많이 스치더군요. 부모님께 불효하고 어떻게 그 분들을 뵈올 수 있을지, 못다 해준 사랑으로 부족했던 못난 남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아쉬움, 허망함.... 나 없이 살아가야 할 가족들의 더 큰 고통 들.... 등 등
그래도 많지 않은 시간동안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절실하게 와 닿는 그런 내용으로 얼버무렸습니다.(숙제이니까? 라는 생각 ....)
늦게까지 글을 마무리 하는 형제들을 보고는 가진 재산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빈정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에게 그 모든 것은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그 남은 재산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도 오로지 나의 몫이 아니라 산 이들 그 남은 자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남은 나의 유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고 나의마음을 비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부복-신부님들이 서품을 받기 전 행하는 행위) 엎드려 삼베 보자기를 머리에 두르고 삼베 끈으로 다리를 묶고(염습의 고유 행위의 하나), 하얀 천으로 덮어 버리니 우린 송장이 된 것이지요.
이때 주님 “김철중 빈첸시오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와 함께 가톨릭 성가 520번-오늘 이 세상 떠난 “오늘 이 세상 떠난 이 영혼 보소서. 주님을 믿고 살아온 그 보람 주소서. 주님의 품에 받아 위로해 주소서. - 주께서 불러 가신 이 영혼 보소서. 이 세상 살 때 주님께 애원하였으니. 주여 그 애원 들어 평안케 하소서.”
우리가 연도를 할 때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하고 난 다음 즐겨 부르는 성가인데 내가 그 노래와 음률을 죽어 흰 보자기에 싸여 듣고 있노라니.... 그 마음은 모든 잡념에서 벗어나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이렇게 죽은 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정 나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며 진정한 눈물은 흘려줄 친구나 가족이 얼마나 될까? 이것이 나의 바램이던가요? 진정 나의 죽음을 슬퍼하며 같이 할 수 없음을 애통해 하는 그들의 진정한 친구로서 살아왔는가? 라는 의구심이 온 머리를 가득 채우더군요. 그런데 또 하나의 느낌은 그 얇은 천 조각으로 덮여졌을 뿐인데 어찌 그리 캄캄했던지....... 그냥 그대로 일어나지 못 할 수도...... 이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는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수 없고 그 누구도 죽음에 직면한다는 실입니다. 오늘은 네 차례지만 내일은 내 차례인 것을 천년만년이나 살 것처럼 허둥바둥 대며 살아가는 모습 우스운 모습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밤새 안녕 하셨어요? 그 밤사이 숨쉬기 운동을 멈추면.... (이강구 신부님 피정)
우리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질 수 있는 인간의 3대 욕심은 식욕, 성욕, 물욕이라 합니다. 여기에 명예욕도 한 자리 합니다. 그러나 옛말에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고 하는데.... 앞에 열거한 4가지 욕심은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나 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가장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자는 것,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사랑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 하는 것, 후회 없는 아름다운 죽음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 내가 느낀 오늘의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난 매일매일 속옷도 정결하고 깨끗하게 갈아입습니다. 그 누가 나의 죽은 모습을 본다 해도 더럽게 빨지도 않은 뚫어지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 살았구나. 라는 말을 듣지 않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다가 갔다는 말을 듣기 위함이라고... (나의시신을 거두는 사람에게...)
이것 또한 준비입니다. 우리 모두 준비 된, 아니 준비되지 않은 그 길로의 여행을 위해서 말입니다.
※ 여기서 피정이라 함은 - 가톨릭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며 수련 하는 일이라 합니다. 영성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일정기간 동안 묵상과 성찰의 기도 등과 같은 종교적 수련을 행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피정은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했던 일을 그의 제자들이 본받아 수행하게 되면서부터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피정이 공식적으로 소개된 것은 반(反)종교개혁 시대로,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그의 책 〈영성수련〉에서 실제적인 피정의 수련방법을 발전시키면서부터입니다. 그 후 1922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그를 '피정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으며, 많은 가톨릭 성인(聖人)들의 지지로 피정은 더욱 확산되어 17세기에는 '피정의 집'이라는 특정한 피정 장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19세기 이후 성직자를 위한 연례 피정을 실시해 현재는 교회법으로 성직자들은 최소한 3년에 1번, 수도자는 1년에 1번 피정에 참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피정의 방법은 종래의 기도·묵상·성찰·강의 등과 함께 요즘은 '만남'과 '대화' 같은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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