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묵상

슬픔이 기쁨으로

더 창공 2009. 12. 15. 10:41

슬픔이 기쁨으로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마태 17,22-23 ; 루카 9,43-45)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 30-32)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당에 왜 다니십니까?" 하고 물으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답이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가 그것입니다. 세상사에 허덕이다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하여 성당에 다닌다는 것이지요. 이 말대로라면 성당에는 기쁨보다 슬픔이 많을 법한데 전례 때마다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온통 찬미와 찬양, 그리고 기쁜 소리뿐이니, 슬픔이 기쁨으로 다독여지는 곳이 또한 성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이야기를 두 번째로 들려주십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어린 아이를 고치시며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 주신, 한마디로 '잘나가시던' 예수님이 또 한 번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고 또 듣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잘나가시던' 예수님 덕분에 기쁨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슬픔을 예고하는 이 말씀이 그리 달갑지 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말씀을 '못' 알아들었다기보다 곧 '안' 알아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기쁨만을 나누고 싶어 하면서…

 

세상일에는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 수 있지요. 슬픔 없이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고, 예수님 역시 슬픔 뒤의 기쁨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쁨이 있으면 그보다 더 큰 기쁨만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크게 자라는데 말입니다. 기쁨은 다가올 슬픔을 준비시키고 슬픔은 기쁨을 예고합니다. 그래서 슬픔과 기쁨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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