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훈화

윤회

더 창공 2011. 1. 4. 14:39

윤회

 

[요한 1서.4,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한날한시 조금도 멈추지 않고 돌고 돌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삶이란 생각을 합니다. 시작이요! 마침인 그것이 곧 마침이 시작이고, 시작 또한 마침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제가 마땅하게 했어야 할 행동 이었는지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 이었는지 지금 제가 판단하고 평가하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 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선 저의 그 돌출 행동으로 인해 물의를 일으키고 또 다른 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겨 준데 대해 죄송하다는 말로 대신 하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우리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아련한 추억이겠지요. 나의 삶을 돌아다보며 아~~ 그 땐 정말 힘들고 불행 했었지, 그래서 죽고만 싶었지..... 아니면 그땐 정말 행복한 순간 이었어 이 시간이 영원히 멈추지 말았으면 하는...... 그러나 불행도 행복도 나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주워 담을 수 없는 엎어진 물이지만 그래도 그 물을 쓸어 담을 수밖에 없도록 단원들의 기도와 염려로 인해 다시 이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따라서 윤회에 대한 생각이 언뜻 들게 되더군요.

 

윤회(Samsāra, 輪廻)는 우리의 삶이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가며 거듭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윤회에 따른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존재를 지속시키는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태어난 우리들 중생은 여기에서 한 일(業)에 따라서 여섯 가지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저곳에서 돌아 넘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천신(天), 사람(人間),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앞의 세 가지 삶은 좋은 업을 이룬 이들이 돌아가는 길(三善道)라 부르며, 다음의 세 가지 삶은 나쁜 업을 이룬 이들이 지나가야 할 길(三惡道)라 부릅니다.

 

윤회라는 말 자체는 중생이 미혹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기를 수레바퀴처럼 멈추지 않고 유전함을 의미합니다. 윤회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는 '흐름'이라는 뜻으로 생명체가 생사를 반복함을 가리키며, '생사'(生死)라고도 번역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 합니다. 또 인도에서 상사라는 '세계'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어, 생사·윤회·세계는 상응하는 개념입니다. 이로부터 전개되는 윤회설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는 업(業 )과 필연적으로 결부되며, 또 윤회의 주체인 영혼의 문제가 주요쟁점이 된다고 합니다.

 

기본 원리를 보면 인간 사후의 운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여기서의 관심이 이후 점차 윤회설로 발전해갔습니다. 윤회는, 불교를 제외해야겠지만 일반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영혼은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 영원불변의 실체이므로 인간이 죽더라도 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재생하더라도 거기서의 행위(業)는 반드시 다시 업력을 낳기 때문에, 영혼은 계속 업력의 지배를 받으며 죽음과 재생을 무한히 반복해간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사후에 재생하는 저승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안락한 천상의 세계와 고통스런 지옥의 2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각종 동물로 태어난다고 하는 통속적 관념이 성립되었습니다. 또 천상의 세계라 하여 윤회가 끝나는 것은 아니고, 거기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업이 다하면 다른 세계로 재생해야 하며 그 세계 역시 윤회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업의 영향은 바로 자신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며, 현세가 아니라면 내세 또는 그 이후에 반드시 나타난다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자신의 상황은 곧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단지 육체의 파괴만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죽음을 존재의 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적 기능보다도 정신적 기능의 소멸이 죽음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같은 생사관에서 중시하는 것은 정신적 기능을 산출하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점을 적용한 대표적인 예가 무심입니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는 번뇌와 업을 양성하지 않는 무심의 경지를 계발함으로써 극복 될 수 있고, 이러한 관념에서 죽음과 생명의 결성은 산란한 마음에만 있으며, 무심은 결코 생명을 손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명을 받는 덴 번뇌가 원인이 되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무심에서는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심에는 죽음도 없고 출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심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사람은 삶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사십대의 젊은이 못지않게 정열적으로 활동하는 한 노학자의 고백에서 그 궁금증을 풀어 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수행이오. 내 마음과 몸이 내 마음대로 즐겁게 된 것이 열반이다. 이것이 가장 뛰어난 행복이다. 나는 지금 즐겁고 편하다. 나의 나이는 알바가 아니며, 알 필요도 없다. 즐겁고 편안한 이 마음을 관조 하면서 저 찬란하고 화려한 화장 세계의 일체의 불, 법, 승과 더불어 즐길 뿐이다.” (정 태혁 박사의 "멋지게 살고 멋지게 가는 길")

- 아 멘 - 2011년 1월 4일

 

 

※ 천신(天) : 하늘에 있다는 신 또는 하늘의 신령.

아수라(阿修羅) : 불교에서는 제석천(帝釋天:아수라를 징벌하는 하늘의 임금.)과 곧잘 싸우는 귀신

축생(畜生) : 불교의 육도윤회 중 네 번째로 죄를 덜 지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귀신이 동물로

아귀(餓鬼) : 계율(戒律)을 어겨 아귀도에 떨어진 귀신, 몸이 앙상하게 마르고 목 구멍이 바늘구멍 같아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늘 굶주린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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