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훈화

억울한 죽음

더 창공 2009. 8. 31. 15:09

억울한 죽음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 중에 가장 얼울하게 죽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우스갯소리에 등장하는 죽음의 유형에서 가장 억울한 죽음을 순위로 보면, 첫째 내일 결혼할 처녀나 총각, 둘째 버스 출발하려는데 뛰어 와서 가까스로 잡아 탄 사람, 셋째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 버린 사람, 넷째 35번 버스를 85번 인줄 잘 못 알고 탄 사람 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에는 항상 애환과 사연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그 누구 하나하나 사정을 듣다보면 그냥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은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는 것이 정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다간 사람인지 우리 인간들의 작은 머리로는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다만 그 이후에 주님께서 판단하실 가장 큰 숙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며칠 전 성가병원에서 어느 자매님이 손과 팔이 저려서 그러니 주물러 달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파킨스씨병인데 소화 장애로 영양섭취도 안되고 혈액 순환이 안 되다보니 이렇게 저림 현상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하면서 이젠 내 인생도 끝인가 봅니다. 하더군요. 해서 연세가 어떻게 되었냐고 하니 이제 60이랍니다. 내 보기엔 환자라서 이기도 하겠지만 70은 넘어 보였는데 말입니다. 해서 이제 한참 건강을 찾아 행복 하게 사셔야 할 나이인데... 라며 말끝을 흐리니, 하느님은 너무 하시다는 겁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 중에는 나대신 아픔을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대신 아픔을 같이 공유하는 사람들을 정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자매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대신 병마와 고통에 힘들어 하시기 때문에 우리 건강한 이들이 이렇게 작지만 도움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그렇다면 다행이고..... 라며 말끝을 흐리시더군요.

(파킨슨씨병이란? 느린 운동, 정지시 떨림, 근육 강직, 질질 끌며 걷기, 굽은 자세와 같은 파킨슨 증상들을 특징으로 하는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이다. 주로 흑질의 불완전한 도파민의 생성 및 작용으로 운동신경 피질의 자극이 감소되어 일어난다. 심각한 인식 장애와 미약한 언어 장애도 발생하는데 만성적이고 진행적이다. 일본뇌염, 뇌매독, 이산화탄소 중독, 망간 중독이나 윌슨병에 걸렸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발병할 수 있는 확률은 1천 명 중 1명꼴이지만 나이가 많을수록 발생빈도가 높다. 그리고 운동장애가 발생하여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게 된다.)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느님이 있다면 왜 나에게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들 이외에도 죽음을 앞둔 이들의 행동거지가 지나고 보면 그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라고들 말합니다. 평상시에는 하지 않던 선행을 하고 아니면 누가 보고 싶다하고 생전에 좋아하지 않던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등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연들을 남기고 떠나곤 하지요.

죽음은 우리 종교에서 말하는 엄청난 신비입니다. 누구나 죽음에 직면한다는 확실함과 동시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한 사실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 속에서 자꾸 죽음을 지연 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생명 연장 책으로 인명을 경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쫒기고 있는 꿩이 자신만 안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머리만 쳐 박으면 아무도 모르게 해결 되리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요즘 죽음을 맞는 사람들에게 나이와 연륜이 비례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린이라 해서 반드시 죽음에서 배제되고 보호를 받는다는 것에서 탈피해야합니다. 어린이들에게도 참된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억울하게 죽는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나의 죽음 이 또 하나의 자연의 일부이면서 하느님의 뜻임을 일깨워주어 편안하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우리들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병원에서의 맞는 불확실한 죽음보다는 예전에 집에서 가족들과 조용하게 이별하는 자연사가 가장 아름답고 억울함이 없는 죽음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합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게 살았고,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의 증오를 받아 어이없이 죽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모습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죽음을 닮는 것이 됩니다.

모든 죽음에는 조금씩 억울함이 있습니다. 애매하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안타까움이 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죽음이 됩니다. 세례자의 죽음 역시 ‘이런 사실’을 묵상하게 합니다. 억울함이 깊으면 희생도 깊은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만 생각하면 ‘어린이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억울함에서 ‘감사’를 찾아낼 때 아름다운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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