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훈화

좋은 몫 나쁜 몫

더 창공 2009. 10. 5. 12:40

좋은 몫 나쁜 몫

 

부자인지 알려면 돈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보면 되고, 똑똑한 사람인지 알려면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살펴보면 되고, 건강한 사람인지 알려면 건강검진을 받아보면 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곳은 이런 기준마저도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자일수록 더 가난뱅이 심보도 많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일 수록 더 바보짓을 하며 건강한 줄 알다가 소리 소문 없이 한 방에 떠나는 것이 또한 인생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루가10,40-42)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 대하여 혹은 어떤 가치에 대하여 단정을 내린다는 일에 조심하게 됩니다.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도 악도 모호합니다. 선도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악도 대단히 많은 경우 선의 얼굴을 하고 더욱 활개를 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이 악인 줄 모르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예전에는 나쁜 놈의 개념이 확실했습니다. 어린 시절 즐겨 부르는 노래에도 앞에 가는 놈은 도둑놈, 뒤에 가는 사람은 순경 - 도둑놈은 나쁜 놈이고 경찰관은 좋은 놈입니다. 깡패는 나쁜 놈이고 검사는 좋은 놈입니다. 공산주의는 나쁜 놈이고 민주주의는 좋은 놈입니다. 가난은 나쁜 놈이고 부자는 좋은 놈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살며 깨닫습니다. 착한 놈의 얼굴을 한 나쁜 놈이 얼마나 많고, 나쁜 놈이라 생각하는 중에 오히려 인간적인 양심이 더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선의 개념도 희미해집니다.

선하게 사는 일이 어리석은 짓이 되고 바른 양심을 지키는 일은 외골수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이제 두려워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들키는 것입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당당합니다. 선의 가면, 위선의 얼굴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선이 수치를 당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바른 양심을 지키고 선한 마음을 합당하게 대접하는 일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이제 신앙인인 우리가 고집처럼 받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추슬러야 할 때입니다.

“돈이 희망인 세상에 하느님을 희망할 줄 아는 고집, 성공이 희망인 세상에 바름을 희망할 줄 아는 고집, 능력이 희망인 세상에 부끄러움을 희망할 줄 아는 고집이 필요합니다. 제 아무리 세상에 선과 악이 혼합되어 가름하기가 어렵다 해도 하느님을 희망하고 올바름을 희망하며 자신의 영과 육을 닦을 줄 아는 염치의 신앙인에게서 좋고 나쁨은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양심을 팔아버리면 그 영혼은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영혼이 매장되면 그 육신은 제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했을지라도 살아도 이미 죽은 인간들입니다. 살아도 죽은 인간들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 백두대간 지척에서 죽음의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머리 똑똑한 사람보단 마음 여린 사람이 좋은 놈이고, 돈 많은 사람보단 양심을 지키는 사람이 좋은 놈이고, 몸 건강한 사람보단 영혼이 맑은 사람이 좋은 놈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 다양한 사건이 조화를 이루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과거 아날로그 방식의 시계를 보면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서로가 어긋남이 없이 서로를 돌려주기 때문에 그 힘으로 시간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나거나 모자람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갈 때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는 요즘의 디지털 사회 보단 아나로그 사회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삶의 방식이나 직업에도 귀천이 있고, 가능하면 잘난 직업, 힘 있는 직업, 권력과 가까운 삶을 찾는 데 온 노력을 기울입니다. 남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고, 더 좋은 옷과 집과 차를 갖고 싶어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보다는 폼 나고 대접받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좋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학과와 상관없이 고시나 공무원, 의과대학원 시험에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몇 가지 직업과 삶만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잘나고 싶어서겠지요. 잘난 사람만 사는 세상은 행복할까요? 아니요. 오히려 끔찍합니다. 모두가 저 잘났다고 떠들고 싸울 테니까요. 그 잘난 사람들은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고 농사짓고 집 짓는 힘든 일은 하지 못할 테니까요. 사람 사이에는 직업의 귀천도 높고 낮음도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돈 많고 권력을 가졌다고 더 우대해 주고, 돈 없고 힘없다 하여 무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이 있는 분입니다. 무엇이?가 아니라 어떻게?가 하느님께는 중요하고‘어떻게’로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자신을 헤아릴 줄 아는 자가 남도 헤아릴 줄 알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타인에게 선량하고 온순합니다. 흐르는 물은 얼지 않는 법입니다. 생각이 부지런하면 착한 마음이 늘 함께하여 자기 몫을 다하는 완성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아 멘 -

 

나의 몫 - 이 해인 -

 

우리를 흔들어 깨우소서.....

 

나아닌 그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해주길 바라고 미루는 사랑과

평화의 밭을 일구는 일 비록 힘들더라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집을

내가 먼저 짓기 시작하여

더 많은 이웃을 불러 모으게 하소서.

 

우리가 배불리 먹는 동안

세상엔 아직 굶주리는 이웃 있음을

따뜻한 잠자리에 머무는 동안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이들 있음을

잠시도 잊지 않게 하소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생명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생명을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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