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타난 육신의 부활신앙 (이중섭 신부)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과 식자층은 과거의 예수,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반면에 일반 신자들은 종말론과 후세의 문제, 연옥과 영혼구원 사정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사실 한국 천주교회가 성공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잘 관리하기 때문이다. 상가 집에서의 연도, 장엄한 장례식, 교회묘지, 죽은 사람들을 위한 연미사 등은 천주교회가 가진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 사람이 죽어야 종교도 살고, 종교인들도 산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동안 죽음, 천당, 연옥, 지옥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런 종말론(終末論)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즉 이런 종말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영광 속에 '돌아오실' 것이다. 이것은 다시 오시는 것도 아니고 두 번째 오심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세상 끝날 에서부터 우리를 향하여 계속 오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의 약속을 채워 주는 사건이 바로 주님의 오심이다. 주님께서 영광 속에 돌아오실 때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도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은 무서운 심판의 때가 아니라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신흥종교들은 이 세상의 종말을 강조하면서 무서운 심판을 부각시킨다. 이것은 다분히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각본인 것 같다. 종말론은 우리의 희망을 고백하는 것이며, 살리시고 모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육신으로 부활할 것이고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거듭 말하거니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은 구원을 확정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모든 사람이 육신으로 부활할 것이다. 전통적 표현인 '육신의 부활'은 곧 인간의 부활을 뜻한다.
구약성서 초기의 작품들에서는 부활신앙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언자들의 시대에는 기복이 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고 생명의 하느님, 재건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차츰 각 개인의 장래와 후세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별히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시기를 통하여 미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혜문학에서는 인과응보의 문제를 숙고하게 되었고, 현세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정의는 후세에서라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혜문학은 영혼의 불멸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러나 육신부활 사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드디어 기원전 2세기에 육신부활 사상이 등장했다. 하느님의 법을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부활하리라는 사상이 마카베오 하권에 분명히 나타난다.(7장. 12장). 그리고 다니엘서 12장 2-3절은 유다인들의 종말 부활신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이다. 인간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덕분에 널리 보급되었다. (사도 23,6-8 참조). 그러나 마카베오 하권 7장 1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종말에 있을 부활은 의인에게만 국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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