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훈화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더 창공 2010. 9. 20. 10:30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루카 8,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지루하고 그렇게도 모질게 굴었던 한여름의 더위도 짜증스럽기만 했던 빗줄기도 이젠 역사의 항을 넘기면서 한 시절 풍미했던 황금기를 등 뒤로 하며 가을이라는 새 계절에게로 자리 물림을 하고 있습니다.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빛을 이기겠습니까?

가수 김광석의 노래인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라는 가사가 참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서른 즈음이 아니라 예순 즈음이 아니던가요?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만 있으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긴 터널의 어둠속에서도 어둠을 통과하면 밝은 빛이 있다는 희망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 긴 터널 다음에 또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느 누가 새 희망을 가지고 지금의 어려운 역경을 헤쳐 나가려 하겠습니까? 반드시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 할지라도 백배 천배 되는 큰 어두움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나아가는 삶의 모습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하지요. 어둠속에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밝은 빛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서른의 나이를 떠나보낸 것을 아쉬워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희망의 중년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서른을 희망으로 받아들일 때 아름다운 중년의 밝은 빛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어둠속에 살아간다면 주변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지만, 강렬한 빛을 받고도 아름답게 변하지 않을 만큼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한 삶의 모습이란, 스스로 비굴하지 않고 솔직하고 당당한 삶의 모습을 택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남들에게 판단되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스스로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당당할 수 있는 모습이 빛으로 나아가는 삶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나보다 더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능력에 대하여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함을 숨기려하고 없는 능력을 있는척하려다 보면 시기하게 되고 스스로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요즘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배소송을 제기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라"고 모 변호사는 말을 합니다. 이 사건도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증거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론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 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진실은 묻히고, 진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언론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결코 바람직한 언론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빛과 어둠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빛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어둠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어둠은 스스로 문을 닫는 모습입니다. 빛은 모두를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 아 멘 -

2010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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