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훈화

고생 하는 자에게 빛을

더 창공 2010. 9. 28. 17:52

[욥기 3,20]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95%의 사람들은 모두 고생고생을 하면서 지금 이 환희와 기쁨을 맛보는 것일 겁니다. 그저 조상님과 부모님을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이들도 5%안에는 존재 하겠지만 그 들 나름대로 어둠의 그림자가 없다고 이야기 하는 이들은 아마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어둠 속에서 가지는 그 고통의 끝에 기쁨의 빛을 보기 위해 우리들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들은 거처할 둥지도 있고 먹을 것 걱정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거처할 곳도 먹을거리 한 끼니도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번 추석 전에 무지막지하게 퍼 부었던 국지성 호우로 인한 피해도 가난한 자들입니다. 지하 방, 반 지하 방이나 임시 거처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실 때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하여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야지 하루 벌어 열흘을 아니면 1년을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을 주셨다면 너무 나태하고 게으름뱅이가 판을 치기 때문에 그날에 감사하고 열심히 살아가라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좋던 싫던 죽음이란 고약한 놈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중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린 늘 착각 하고 살고 있습니다. 몇 백 년을 살 것처럼 지지고 볶고 싸우고 미워하고 시기하면서 말입니다. 내 삶이 시한부 삶이라 생각하면 얼마나 삭막하고 어찌 해야 할까 방황하고 만리장성을 하루에도 몇 번 씩 쌓았다가 허물었다 하면서 그 고통의 심경을 나타내겠지요. 그러나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남은 시한부 삶을 돌이켜 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욕심 이라는 끈임 없는 욕망의 울타리에서 고개만 한 번 들고 시한부인생을 볼 수 만 있다면 그런대로 삶의 무게가 덜어지지 않나 생각이듭니다.

 

<숨겨진 햇볕> 인천가톨릭대 종교미술부 교지에 실린 글 중 일부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그분께서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는 성경에 나오는 욥의 절규다.

욥은 의인으로 살다가 갑작스레 재앙을 만나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잿더미에 앉아 분노에 차 하느님께 외친다.

인간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왜 이런 어려움과 시련을 나에게 주는가?

자비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왜? 왜? 왜?

 

“나는 죽은 것 같았으며, 욕망만이 살아 있었다.

이 욕망의 원수와 함께 나는 혼자서 예수의 발아래 몸을 던졌으며

나의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리고 나는 몇 주일을 단식함으로써

나의 육체를 길들였다.”라고 고백하신 예로니모 성인을 생각합니다.

- 아 멘 -

2010년 9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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