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현상 (이중섭 신부)
우리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사말(四末)을 이야기한다. 사말이란 네 가지 끝에 관한 문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이 사말이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결국에는 죽어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하고,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죽음은 일단 엄연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보편적 진리일 뿐,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남의 죽음을 목격하고 구경하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체험하지는 못한다, 죽음은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고 현상이니까 다만 우리 각자는 조만간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 뿐이다.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우리 각자의 죽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늘 불투명하게 생각되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죽음이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미루며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죽음이 관계의 파괴라고 생각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망자의 부재를 느낀다. 즉 그 사람이 없어져 버렸고 우리를 떠나 버렸으며 그래서 그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기껏해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도 오래 가지 않고 죽은 사람은 무관심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맺었던 관계는 양쪽에서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죽은 사람이 우리를 떠나 버렸으니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고, 살아있는 우리들도 죽은 사람을 점점 더 잊게 되므로 죽은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셈이다. 그러나 죽음은 관계의 파괴가 아니라 관계의 변화이다. 죽은 사람과 우리는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르고 새로운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다.
한편, 죽음은 사회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원래 한 사람의 죽음은 한 공동체의 경험이다. 즉 죽은 사람을 혼자서 처리하지 않고 한 가족이나 사회단체가 장례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죽지만 집안 식구들 앞에서 죽기 때문에 사람의 죽음은 사회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 사회에 맞는 상례예절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례예절 덕분에 죽음이 수습되고 극복된다.
상례예절을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례예절은 농경문화에서 생긴 것이라서 도시생활에 잘 맞지 않는다. 시체가 둘 데가 없는 아파트 같은 데서는 장례를 치르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을 귀찮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현재의 도시생활은 어떻게든 죽음을 감추려 하고 죽음과 멀리 떨어져 지내려고 한다. 이런 태도에서 폭력과 유흥이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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